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aid/2012/01/31/6884408.htm
미식, 탐식, 악식
맛있는 음식을 찾아 먹는 일을 두고 미식(美食)이라 한다. ‘아름다울 미’를 쓰는 덕에 음식을 먹는 일이 아름답기까지 하다는 의미가 부여됐다. 그래서, 미식가라고 하면 아름다움을 아는, 그러니까 예술의 한 경지를 즐기는 사람으로 여긴다. 맛있는 음식에 대한 욕구는 모든 인간에게 있다. 이 욕구를 절제하지 못하는 일을 두고 탐식(貪食)이라 한다. 탐식은 인간의 삿된 욕구로 보고 이를 경계하는 것이 보통의 도덕적 규범이다.
미식과 탐식은 그 경계가 모호하다. 예를 들어, 사료를 억지로 먹여 키운 거위의 간을 맛있는 음식으로 여기고 먹으면 미식이라 할 수 있고, 그 눅진한 간을 맛보기 위해 거위에게 고통을 주면서까지 키우는 일을 생각하면 인간의 삿된 욕구에 봉사하는 탐식이 될 수도 있다.
스스로 미식가라 여기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도덕적 타락자인 탐식가로 치부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탐식이라는 도덕적 결함을 숨기려고 노력한다. 고급한 공간에서 기술 좋은 요리사가 온갖 장식을 한 음식을 내놓게 하고는 이를 예술이라고 말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즉 돈 있는 사람들이나 그 미식의 세계에 들어올 수 있으며, 이는 탐식과는 다른 영역의 일인 듯이 등을 돌리고 앉는다. 그렇게 하여 탐식은 햄버거 같은 정크푸드나 먹고 비만해져 있는 하층계급의 일인 듯이 몰아버린다.
나는 스스로를 악식가(惡食家)라 이른다. “부러 거친 음식을 찾아 즐긴다”는 악식의 사전적 의미를 넘어 거친 음식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쓰고 있다. 미식의 호사, 탐식의 무절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악식이란 태도가 내 눈에 그럴 듯해 보인 것이다. 그런데, 나의 이 악식을 두고 미식이라며 부러워하는 이도 있고 탐식이라며 혀를 차는 이도 있다. 이해하고 또 용서하시라. 나는 일로 먹을 뿐이고, 가끔은 내 악식의 밥상이 너무 괴롭다.
음식에 대한 욕구를 극단으로 절제하는 사람들이 불가에 있다. 시중에 사찰음식이라고 파는 ‘화려한 한정식’이 있는데, 이는 전통적인 불교음식과는 거리가 있다. 불교 전통에서 스님이 끼니를 얻는 방법은 탁발이었다. 얻어먹는 것이다. 대중에게 밥을 얻는 대신에 스님은 수행을 하여 깨우치고, 그 깨우침을 대중에게 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스님의 끼니는 이걸 먹겠다 저걸 먹겠다 할 수가 없었다. 대중이 주는 대로 먹어야 했다. 한국 불교에서 탁발은 사라졌지만 발우에 든 것이면 다 먹어야 하는 전통은 남아 있다.
불가에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스님이 탁발을 나갔다가 한센인 집에 가게 되었다. 한센인이 스님의 발우에 밥을 담는데 덜렁이던 손가락이 툭 떨어져 발우에 담기고 말았다. 스님은, 그 손가락도 먹었다.” 발우 안의 한센인 손가락은 ‘무욕의 음식’을 상징하는 것일 게다.
음식은 그냥 있을 뿐인데, 그 음식을 대하는 마음에 따라 그 음식은 달라진다. 미식의 것일 수도 있고 탐식의 것일 수도 있으며 악식의 것일 수도 있다. 무욕의 음식은 감히 넘보지 못하여도, 삿된 욕구를 조금이나마 줄이면 음식 먹는 일이 달라질 것이다.
황교익 맛칼럼니스트
<*지면 구성상 내용을 일부 편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