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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4주] 일제 침략, 양민학살의 기억...파도의 울음을 듣다

송악산(104m)의 옛 이름은 절울이오름이다. 물결(절)이 우는 오름이라는 뜻이다. 그 만큼 파도가 드센 오름이라는 뜻이다. 송악산은 마라도 바다를 향해 비쭉 튀어 나와 있어 언뜻 코지(곶)가 연상된다. 바다에서 보면 거대한 성이 우뚝 솟은 것처럼 보인다. 바다와 맞닿은 면은 가파른 절벽을 이루고 분화구를 중심으로 넓고 완만한 초원이 펼쳐져 있다.

송악산 정상에 오르면 절경이 펼쳐진다. 둘래 400m 깊이 69m의거대한 분화구가 옥빛 바다를 배경으로 입을 쩍 벌리고 있다. 그러나 이 절경을 한동안은 마주할 수 없다. 지난해 8월부터 오는 2020년 7월까지 송악산 정상 탐방로와 정상으로 난 탐방로 모두가 폐쇄됐다. 자연 훼손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해안 절벽이 계속 무너져 안전사고의 위험이 더해졌다.

그래도 송악산에 드는 발걸음은 여전하다. 올레꾼도 여전하고, 중국인 관광객도 여전하다. 분화구도 못 들어가지만 절벽을 따라 이어진 탐방로만 걸어도 추억으로 충분하다. 길이 쉬워 걷는 부담도 없다. 해안을 따라 송악산 둘레를 한 바퀴 다 돌아도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송악산이야말로 천혜의 관광자원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절경에는 혹독한 역사가 얹혀져 있다. 1945년 일본은 제주도를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한 최후의 보루로 삼았다. 일본군은 섬 곳곳에 군사시설을 건설했는데, 송악산에 가장 많은 수의 일본 군사시설이 남아 있다. 송악산 능선과 해안에서 발견된 진지동굴이 60개가 넘는다.

송악산과 초원으로 이어진 섯알오름 근처에 일본군 비행장이 있다. 이름하여 알뜨르 비행장이다. 일본군이 알뜨르에 건설한 격납고는 모두 38기였는데 현재 19기가 보존돼 있다. 감자,고구마,배추 따위가 뒤덮은 넓고 푸른 초원이 그 시절에는 폭탄을 실을 전투기의 활주로로 쓰였다니 새삼스럽다. 실제로 일본군 전투기 600기가 이 활주로를 출발해 중군 난징을 폭격했다고 한다.

일본군사시설을 목격하는 일이 화가 난다면 양민학살의 현장을 지켜보는 일은 가슴이 아프다. 섯알오름 북쪽 자락에 ‘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자 추모비’가 있다. 검은 비석 뒤의 웅덩이 2개가 끔찍한 역사의 현장이다. 1950년 8월 20일 한국 계엄군이 불순분자 색출을 명목으로 제주도민 210명을 검거했다. 계엄군은 양민 210명을 법적 절차 없이 한밤중에 총살해 웅덩이에 던졌다. 일부 시신은 수습됐으나 시신 대부분이 내버려졌다. 계엄군이 웅덩이 일대를 출입금지지역으로 지정해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7년 뒤 출입금지지역이 해제됐다. 시신을 수습하려고 봤더니 유골이 엉켜 있어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유족은 희생자를 한 조상으로 함께 모식로 하고 유골만 추려 봉분 132기를 만들었다. 그 공동묘지의 이름이 ‘백 할아버지 한 무덤’이라는 뜻의 백조일손묘(百祖一孫墓)다. 송악산에 부딪쳐 우는 파도에는 참 많은 사연이 얹혀 있다.

<중앙일보> 글,사진 손민호 기자

<*지면 구성상 내용을 일부 편집했습니다.>